도자기의 이해


고려 왕실 도자의 역사


고려청자의 탄생과 중국 자기와의 관계


청자 참외 모양 병, 고려 12세기 전반,
전 인종 장릉 출토, 국보 94호,
높이22.6cm, 굽지름7.4cm
  고려청자는 통일신라(676-918년) 말, 9세기 중엽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고려(918-1392년)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청자를 말한다. 초기의 청자는 한국에 수입된 중국 청자의 영향을 받아 형태와 문양 장식 등에 있어 중국의 자기 양식을 따랐으나, 11세기부터 고려청자 고유의 양식이 뚜렷이 나타났다.
  고려청자는 비색, 인물과 동식물을 본 뜬 각종 형태, 문양을 나타낸 상감기법, 이 세 가지로 유명하다. 고려청자의 비색은 중국에서도 유명했다. 중국 송의 태평노인이 자신의 책인 [수중금]에서 고려청자의 비색을 천하제일이라고 평가한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인들의 고려청자 애호 성향은 고려 말에도 여전했다. [성호사설] 제4권[만물문] ‘비색자기’에 의하면, 충렬왕 15년(1289) 중국 원에서는 중서성이라는 관청을 통하여 청자 옹기, 동이, 병을 구해갔다고 했다.
  이런 문헌 기록을 통해서도 초기에 중국 자기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청자가 점차 중국인들이 수입해 갈 정도로 고유의 우월성을 지녔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청자의 품질과 세련된 양식에 대해서는 [경덕진도록]에도 전한다. 고려청자는 섬세하고 유색이 용천요와 유사하고, 정요 백자의 섬세한 문양과 같고, 월요 비색이나 여요의 여러 양식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려청자는 중국인들에 의해 자신들이 최고급품으로 평가한 자기와 비교했을 때 유사하다는 품평을 받았다. 이는 고려청자가 당시 세계 최고의 품질을 갖추었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고려에 수입된 중국 자기는 북송 시대에 집중되었고 그 후에는 양도 적을 뿐 아니라 양식적으로도 한국 자기에 끼친 영향이 거의 없다. 그 이유는 고려청자가 11세기 경부터 향상되기 시작하여, 12세기에는 세련된 양식을 갖추며 대량생산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 자기를 더 이상 수입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왕실 도자의 양식과 왕릉 출토품


  고려청자에는 불교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고려가 불교를 신봉했기 때문이다. 고요하고 차분한 푸른 옥과 같은 유색[비색], 보살과 동자 등의 형태, 연꽃과 연봉오리와 연꽃 줄기 등의 장식, 이 모두가 불교와 관련된다. 절터에서도 다량의 청자가 출토되고 있으며, 불교 법구와 사찰의 이름과 용도 등이 표기된 청자들이 전해 오고 있다.
  그런데 불교적 문양 장식으로 치장된 청자라 해도 사찰용에 비해 왕실, 귀족관 관료가 사용한 것들이 더 많은 수를 차지한다. 이들이 사용한 청자는 매우 세련된 최고급품이었으며, 왕실 무덤의 이름, 관청 이름, 중국 연호 등이 명문으로 새겨진 것도 있다.
  어쨌든 최고급 청자의 최대 수요자는 왕실이었다. 왕실에서 직접 사용하기 위한 것도 있었고, 귀족 관료들에게 하사하거나 중국이나 일본과 교류를 목적으로 한 것 등 그 용도는 다양했다.
  왕실 자기는 왕족의 무덤과 왕궁터, 왕실과 관련된 사찰이나 유적에서 발견된 자기들을 통해 그 실체가 밝혀진다. 특히 고려 17대 인종(재위 1122-1146년) 장릉, 19대 명종(재위 1170-1197년, 죽은 해 1202년) 지릉, 21대 희종(재위 1204-1211년, 죽은 해 1237년) 석릉 등 왕릉에서 출토된 청자는 당대 최고의 왕실 청자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인종 장릉에서는 인종 시책과 함께 청동 내함, 석제 외함, 청동 인장, 은제 숟가락과 젓가락, 청자 4점이 출토되었다. <청자 참외 모양 병>, <청자 합>, <청자 뚜껑 있는 잔> 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청자의 특징은 유색이 반투명에 가깝고 광택이 은은하며 문양이 없다는 점이다. 굽바닥은 유약이 깨끗하게 입혀졌고 가는 규석을 3-4군데 받쳐 구워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된 편이다. 특히 몸통이 참외 형태로 주둥이가 나팔꽃처럼 벌어진 병은 당시 청자의 세련된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또 고려 궁궐터인 만월대 유적에서 수습된 청자 기와들도 당시 대량 생산되었던 고급 청자의 일면을 알려준다. 청자 기와들은 가마터에서도 다량 발견되었는데, 표면에 음각 양각의 각종 넝쿨 무늬로 장식되어 매우 화려하며 뒷면에 명문이 있는 것도 있다. 그 예로서 강진 사당리 가마터에서 ‘누서면남’ 즉, 누각의 서쪽면의 남쪽이라는 표시가 음각된 청자 기와편을 들 수 있고, 부안 유천리 가마터에서 수습된 <‘계묘’명 청자 상감문 기와편>도 있다. 만월대 유적이나 가마터에서 발견된 청자 기와들은, [고려사][세가] 의종 11년(1157) 기사에서 양이정의 기와를 청자로 얹었다는 기록을 실물로써 증명해 주는 자료들인 것이다.

청자 넝쿨 무늬 완, 고려 1159년경,
문공유 묘 출토, 국보 115호,
높이 6.2cm, 입지름 16.8cm, 굽지름 4.4cm
  청자는 점차 유색과 조형의 변화를 거치게 된다. 유약은 투명해지고, 가는 금이 많아지며 여러 문양이 장식되었다. 이런 양식의 변화는, 의종 13년(1159)에 죽은 관료 문공유의 지석과 일괄품인 <청자 넝쿨무늬 완>에서도 뚜렸하다. 이 완의 내면에는 넝쿨 무늬가 역상감(바탕을 상감한 문양)으로 빽빽하게 장식되고, 청자유는 상감 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투명하다. 이 문공유묘 출토 청자 완은 당대 최고의 청자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왕실 청자의 양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왕실의 도자기, 서울: 통천문화사, 2008



National Museum of Korea, The Royal Ceramics of Goryeo Dynasty, Seoul: Tongcheon,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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